석재 서병오(1862~1936)
石齋 徐丙五
석재 서병오(1862~1936)는 근대기 “영남이 낳은 천재”라 알려질 만큼 김정희 이후 시, 서, 화 세 분야를 제대로 겸비한 유일한 삼절의 문인 화가이다. 본관은 달성(達城)으로 호는 흥선대원군이 하사한 석재(石齋)이다. 1901년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중국인 서화가들과 가까이 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문인화법의 영향 받아 사군자를 그렸다. 대구에 살면서 영남 일원의 대표적 서화가로 최대의 명성을 누린 그의 전시를 이번 수성아트피아에서 개최하고자 한다. 격조 있는 글과 역동성이 넘치는 작품을 통해 석재의 살아생전 모습을 다시 한번 느껴볼 수 있다.
석재 서병오(1862~1936)
石齋 徐丙五
1862년(1세)
달성 서씨 서상민의 둘째 아들로 음력 6월 11일 태어나 나중에 숙부 서상혜에게 입양됨. 어릴 때 이름은 병로(丙潞), 자(字)는 순원(舜源), 호(號)는 석재(石齋), 석옹(石翁), 석과(石果), 죽서도인(竹書道人) 등
1874년(13세)
선산의 허훈과 산청의 곽종석 문하에서 공부하고 서석지에게 서예를 배움
1879년(18세)
과거 준비를 위해 서울에 머물 때 석파 이하응에게 총명함을 인정받아 운현궁을 출입하며 당대의 문인 문객들에게 알려지고 ‘석재(石齋)’로 아호를 받음, 민영익, 박영효, 박기양, 민형식, 민병달, 민영철 등 명문가 자제들과 교유
1891(30세)
증광시 진사과에 3등 139위로 합격
1898년(37세)
1차 중국 여행(~1902년경) 상해에서 민영익, 포화, 서신주, 양보광 등과 교유
1904년(43세)
일본 정계 거두인 도야마 미쓰루(頭山満)의 초청 등 여러 차례 일본 여행
1907년(46세)
금연상채회(禁煙償債會) 평의원으로 국채보상운동 참여
1908년(47세)
대한협회 대구지회 평의원
신령군수로 부임하나 10여일 만에 사임
2차 중국 여행(~1909년)
1909년(48세)
상해 화단의 대가 포화(蒲華)로부터 <행서 대련>과 <죽석도>를 선물받음
1917년(56세)
여러 시사(詩社)에 참여, 우세정(又洗亭), 모구정(慕邱亭)등에서 시회(詩會)
1922년(61세)
1월 교남시서화연구회(嶠南詩書畫硏究會)를 창립하여 5월 제1회 전람회개최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
1923년(62세)
교남시서화연구회 주최로 대구미술전람회 개최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
1924년(63세)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
4월2일 시대일보 <묵죽> 휘호
1925년(64세)
진주의 백일장 심사위원
진주 서화애호가 유남 박재표의 집에서 휘호회 개최
1927년(66세)
마산에서 개인전
1928년(67세)
제7회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
1929년(68세)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
2월 14일 동아일보 <행서>, <죽석> 휘호
1930년(69세)
1월 2일 동아일보 <죽석> 휘호
1931년(70세)
1월 5일 매일신보 <죽석> 휘호
1932년(71세)
창립 10주년 교남시서화연구회 기금 마련을 위한 ‘석재선생 휘호 서화 반포회’ 개최
1933년(72세)
문우관 관장에 선임
이인성 전람회 발기인
8월 3일 동아일보 <유출유기(愈出愈奇)> 휘호
1934년(73세)
제5회 향토회전 찬조 출품
1936년(75세)
음력 3월 28일 동성로 자택에서 별세